불신·무능한 대응…오늘날 팬데믹 비춘 120년전 전염병 시대

이은정 / 2022-03-11 06: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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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작가 오르한 파무크 신작 장편 '페스트의 밤'
5년간 집필…"코로나19, 내 소설 속 이야기 같았다"
▲ 신작 '페스트의 밤' 펴낸 터키 출신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 [민음사 제공]


불신·무능한 대응…오늘날 팬데믹 비춘 120년전 전염병 시대

노벨문학상 작가 오르한 파무크 신작 장편 '페스트의 밤'

5년간 집필…"코로나19, 내 소설 속 이야기 같았다"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안타깝게도 민게르섬에서 페스트가 발견되었습니다."

1901년 오스만 제국 하의 민게르란 가상 섬에 페스트가 퍼지기 시작한다. 오스만 제국 술탄(황제)이 이 섬에 파견한 방역 전문가는 다른 지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염병 창궐을 경고한다. 그러나 총독은 이를 평온한 섬에 분란을 일으키려는 정치적 음모로 치부하며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 도시에 결단코 전염병은 없소!"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가 최근 국내에 출간한 11번째 장편소설 '페스트의 밤'(Nights of Plague) 속 이야기다.

파무크는 지난 35년 동안 전염병을 소재로 한 소설을 고민했고, 최근 5년간 이 작품 집필에 매달렸다.

원고가 완성돼 갈 무렵 소설처럼 전 세계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대유행하자 작품을 수정한 끝에 탈고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코로나19 얘기를 들었을 때 내 소설 속 이야기 같았다"고 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소설 속 서사는 120여 년의 시간 간극에도 코로나19를 맞닥뜨린 우리에게 기시감을 준다. 방역에 대응하는 각국 태도, 전염병에 맞서는 인간의 공포와 불안, 의료진의 분투, 일부 종교 단체의 독단적 행동 등 오늘날 팬데믹 풍경을 비추는 듯하다.

파무크는 한창 이 소설을 쓰던 2020년 미국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인류 역사와 문학사를 통틀어 감염병을 비슷하게 만드는 건, 세균과 바이러스의 공통성이 아니라 우리의 초기 반응이 같았다는 것"이라며 "팬데믹에 대한 초기 반응은 항상 부정하는 것이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대응이 늦었고, 사실을 왜곡하고 수치를 조작해 발병 사실을 부인해왔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보편적 반응은 소문을 만들고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 것이라고 짚었다.

전염병 역사에 대해 방대한 조사를 한 파무크는 이 작품을 역사소설과 미스터리를 결합한 약 800쪽 분량의 장편으로 완성했다.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가 얽혀 있다.

민게르섬에 파견된 유능한 방역 전문가이자 정통 기독교인인 본코프스키 파샤는 종교적, 정치적 분열의 소용돌이 속에서 방역을 제대로 시행해 보기도 전에 살해당한다. 이 섬은 이슬람교와 그리스 정교회가 같은 비율로 나뉘어 있어 정치적 긴장감이 존재한다.

술탄은 다시 이슬람교도 의사 누리를 파견한다. 의사는 엄격한 방역 조치 시행과 함께 방역 전문가를 죽인 범인을 밝히라는 명을 받는다. 하지만 행정부의 무능, 제재 조치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방역은 실패한다.

그러자 서구 열강의 국제적 압력을 이기지 못한 술탄은 오스만 전함으로 민게르섬을 봉쇄한다. 섬은 자체적으로 전염병을 물리칠 방법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파무크는 종교와 빈부, 계급 등 처한 위치에 따라 사람들이 전염병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국가가 그 속에서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페스트의 증상, 역병이 닥치며 변화하는 삶, 방역 조치의 강도 등 묘사가 구체적이다.

파무크 특유의 문장의 묘미를 살린 번역은 터키 전문 번역가 이난아가 맡았다.

이난아는 역자 해설에서 "음울할 수 있는 전염병 시대의 분위기를 흥미진진한 서사와 독특한 창작기법으로 섬세하게 묘사하며 '바늘로 우물 파기'란 파무크 특유의 작가 정신을 각인시킨다"고 평가했다.

터키에서 지난해 3월 출간된 지 1년 만에 한국어판으로 출간됐으며 영미판은 올 하반기 나올 예정이다.

민음사. 780쪽. 1만9천 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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