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성공한 K팝 기획이 오늘 작동하진 않는다"

이태수 / 2025-11-04 07:3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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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인조 트리플에스 제작 모드하우스 정병기 대표…신간 '기획의 감각' 출간
"지속 가능한 다인원 전문 레이블 목표"…팬 참여 투표 시스템으로 안정성 확보
▲ 정병기 모드하우스 대표 [모드하우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24인조 걸그룹 트리플에스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그룹 트리플에스(tripleS)가 5월 12일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에서 열린 두 번째 앨범 '어셈블25' 언론 공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5.12 scape@yna.co.kr

▲ 인터뷰하는 정병기 모드하우스 대표 [모드하우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기획의 감각 [21세기북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어제의 성공한 K팝 기획이 오늘 작동하진 않는다"

24인조 트리플에스 제작 모드하우스 정병기 대표…신간 '기획의 감각' 출간

"지속 가능한 다인원 전문 레이블 목표"…팬 참여 투표 시스템으로 안정성 확보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어제의 성공한 K팝 기획이 오늘 작동할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시대는 변하기에 영원불멸한 왕도(王道) 기획은 없어요."

국내 1세대 A&R(Artists & Repertoire) 음악 프로듀서로 원더걸스, 2PM, 러블리즈 등에 관여하고 걸그룹 이달의 소녀를 프로듀싱한 정병기 모드하우스 대표는 24인조 걸그룹 트리플에스를 내놔 가요계를 놀라게 했다.

소녀시대(8명)나 아이즈원(12명) 같은 다인원을 아득히 넘는 24인을 한 무대에 올리겠다는 구상도 이목을 끌었지만, 2022년 5월 첫 멤버 공개 이후 지난해 5월 첫 완전체 정규앨범을 내기까지 무려 2년의 시간이 걸린 점도 독특했다.

자신의 K팝 기획 노하우를 집약한 신간 '기획의 감각'을 출간한 정 대표를 최근 서울 강남구 모드하우스 사무실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정 대표는 "기획에 대한 겸손함을 유지해야 한다"며 "순발력 있게 시대의 흐름과 대중의 취향을 읽고 오늘의 철학을 정립하는 게 중요하다"고 자신의 원칙을 밝혔다.

그는 "좋은 기획자라면 뜨지는 못했더라도 좋은 콘텐츠를 선별하는 눈을 키우는 게 필요하다. 좋은 기획자는 좋은 큐레이터라고도 생각한다"며 "많은 콘텐츠에 스스로가 노출돼야 한다. 나 자신도 음악 외에 일주일에 영화 두 편과 드라마 여섯 화, 한 달에 책 두 권을 읽으려고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정 대표는 책에서 시장 분석, 트레이닝 시스템, 데뷔 앨범 제작, 유닛(소그룹)·솔로·컬래버레이션(협업), 굿즈, 월드투어 등 K팝 아이돌 제작의 A∼Z를 읽기 쉽게 풀어냈다. 자신이 프로듀싱한 이달의 소녀와 트리플에스의 생생한 사례는 K팝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흡입력 있게 읽힌다.

정 대표는 "저는 의도적으로 남을 따라 하는 것에서는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며 무분별한 유행 좇기를 경계했다. 투애니원처럼 강렬한 음악이 주류를 이룰 때는 너도나도 걸크러시를 선보이다가 2022년 이후 4세대 걸그룹이 득세하자 이와 유사한 스타일이 쏟아내는 것은 팬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유행을 의도적으로 역행하는 것 또한 위험한 전략이다.

그는 "유행을 피하려다 악수를 두는 기획도 있기에, 유행을 인지하면서 우리만의 원칙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며 "앨범마다 콘셉트가 복고풍 힙합에서 걸크러시로 갔다가 갑자기 청량으로 넘어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잡다한 음식을 메뉴에 올려놓는 음식점은 오래 가지 못하듯이 팬들을 헷갈리게 하는 콘셉트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모드하우스의 24인조 걸그룹 트리플에스는 정 대표가 과거 프로듀싱한 12인조 이달의 소녀와는 어찌 보면 대척점에 있는 팀이다. 이달의 소녀가 몽환적인 음악과 잘 짜인 판타지 세계관을 갖췄다면, 트리플에스는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지극히 현실적인 서사로 무장했다.

정 대표는 "가요계에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예쁘고 화려한 판타지 같은 아이돌도 있지만, 저희는 현실적인 '서울 소녀'라는 콘셉트로 내 바로 옆에 있을 법한 소녀들을 기획했다"며 "우리나라 서울을 비롯해 미국과 일본의 대도시에 사는 이들의 팍팍한 현실을 담고 싶었다. 세상 어딘가 24명의 소녀가 있고, 이 소녀가 사실은 나일 수도 있다는 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트리플에스는 이에 따라 완성형 실력 대신 멤버 본연의 매력을 기준으로 선발됐고, 24명의 멤버가 세 곳의 숙소에서 오순도순 생활하는 모습을 하나의 '작은 사회'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팬들의 관심을 모았다. 앨범 재킷 촬영 작가도, 뮤직비디오 감독도, 음악 프로그램 PD도, 미디어 쇼케이스 취재진도 24명의 다인원은 처음이었기에 행보마다 '가지 않은 길'과 같았단다. 정 대표는 "선례가 없다는 점은 불안 요소이기도 했지만, 파이어니어(Pioneer·선구자)라는 프라이드도 있었다"고 짚었다.

그러나 정 대표와 모드하우스가 무엇보다 신경을 쓴 트리플에스의 차별점은 '오브젝트'(Objekt)라는 디지털 포토카드 판매를 매개로 한 팬 참여형 투표 시스템이다. 디지털 포토카드를 구입한 팬은 앨범 곡 선정이나 유닛 멤버 선정 등 그룹의 중요한 의사 결정을 묻는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

가요 기획사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아이돌 활동과 달리 팬의 참여를 독려함으로써 팬의 충성도를 높이는 전략이다. 하지만 정 대표가 이 시스템에 주목한 또 다른 이유는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다인원 그룹의 지속 가능성 때문이다.

정 대표는 "매출을 올려도 앨범 제작 비용을 공제하는 기존 음반 정산 시스템과 이 오브젝트 정산이 분리돼 있다. 즉 앨범 활동과 별개로 오브젝트는 포토카드에 얼굴이 실린 멤버별로 따로 정산해준다는 뜻"이라며 "오브젝트를 통해 회사도 자체 콘텐츠 제작 비용 등을 마련할 수 있고, 앨범의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멤버들도 일정 소득은 얻을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마니아들이 서로 없는 것을 교환하는 포켓몬 카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앨범 하나가 실패하면 회사가 휘청이거나 아티스트가 돈을 벌지 못하는 기존 생태계를 바꾸고 싶어서 이런 일을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앞으로의 비전으로 "지속 가능한 다인원 아이돌 전문 레이블이 목표"라고 제시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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