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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충무공의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초계 변씨의 묘(충남 아산) [가디언 제공 사진] |
'불굴의 명장'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 변씨를 말하다
윤동한 서울여해재단 이사장 '조선을 지켜낸 어머니'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승전과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1545~1598). 백의종군 등 온갖 난관 속에서도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나아간 멸사봉공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이런 강인함을 지닌 이순신 뒤에는 대쪽 같이 강직한 어머니가 있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앞서 떠나보낸 초계 변씨(草溪 卞氏·1515~1597)는 셋째 아들 충무공을 홀로 뒷바라지하며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키워냈다.
윤동한 서울여해재단 이사장(한국콜마 회장)은 역사탐사서 '조선을 지켜낸 어머니'에서 초계 변씨(1515~1597)를 소환해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일생을 조명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자식을 위해 불굴의 터전을 만든 변씨가 없었다면,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낸 충무공이라는 영웅을 어머니가 길러내지 않았다면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에 처했던 조선은 사라지고 말았을 수도 있다.
변씨는 이순신을 영웅으로 키우고자 세 곳을 옮겨 다니며 자녀를 기르고 가르쳤다. 교육열의 대명사처럼 회자되는 '맹모삼천지교'를 떠올리게 한다.
한양의 거처였던 건천동은 과거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모여든 동학과 가까웠고, 무과생들을 위한 훈련원과도 근거리여서 자식 교육하기에는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조부와 남편이 벼슬에서 멀어지면서 가세가 기울고 자식들의 입신출세에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자 가솔을 이끌고 변씨 가문의 터전인 아산으로 이사한다.
변씨의 세 번째 기거지는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 송현동이다. 그는 아들과 가까운 이곳에서 생애 마지막 5년 동안 기거하며 열세를 이겨내고 23전 23승으로 왜군을 격멸한 아들의 지킴이 역할을 했다.
여장부였던 어머니가 자식의 든든한 정신적 안정처였음은 '난중일기' 곳곳에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에게 모친은 삶의 기둥이자 하늘이었다.
"어머니께 돌아가겠다고 인사를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고 두 번 세 번 타이르시며, 떠나는 것을 싫어하며 탄식하지 않으셨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나이 여든이나 되신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변씨의 강고한 사랑은 장군의 자립, 자주, 충성의 가치관에 평생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변씨의 목숨을 건 뱃길 상경이다.
충무공이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한양의 감옥에 갇히자,"내가 죽고 아들이 살아야 한다면 마땅히 죽겠다"고 결심한 83세의 병든 노모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여수를 떠나 서해 뱃길로 상경하다가 안개와 강풍, 뱃멀미 속에 6일간 표류하던 중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대로 옥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백의종군길로 아산으로 달려가 싸늘한 주검이 된 어머니를 만났다. 난중일기에 당시의 통한을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었다.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고 기록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이런 아픔은 명량대첩과 노량해전에서 승전하는 불굴의 에너지가 됐다. 목숨을 건 장거(壯擧)는 어머니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처절한 은혜 갚음이기도 했다.
저자는 "한 사람의 탁월한 자식 사랑이 위대한 영웅을 탄생케 했다"면서 "우리 역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만큼 위대하며 아들 사랑이 지극했던 역사적 인물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깊은 경의를 표한다.
가디언. 280쪽. 1만6천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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