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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둔산 전투 참여했던 충남여경 제3기 졸업식(1952년 4월) [경찰청·구연홍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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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전쟁 중 전투태세 완비한 여경들 [경찰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토벌가 부르며 총칼 들고 무장 공비와 맞섰던 여경들
대둔산·운문산 등지서 부상병 치료부터 전투까지 참여 기록
(서울=연합뉴스) 이정현 기자 = 1952년 12월, 전북 임실경찰서 소속 이옥자 순경은 입산 중인 북한 공산당원들에 대한 귀순 공작 명령을 받고 동료 남경 6명과 함께 임실군 운암면 마하동으로 출동했다.
한밤중 교전 끝에 적진의 총성이 멎었고, 날이 밝은 뒤 입산자 3명의 시신을 확인했다. 그들이 소지했던 소총 5정과 식사 도구 등도 노획했다.
이 순경은 같은 달 15일에도 남원군 주천면 송치리에서 무장 공비 1명을 사살하고 따발총 1정을 노획했으며 17일에는 구례군 산동면 둔산리에서 무장 공비 2명을 생포하고 소총 2정을 빼앗았다.
총탄이 빗발치는 최전선에서 동료 남경들과 함께 목숨을 걸었던 여경들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성별과 관계없이 모든 경찰관에게 울림을 준다.
1954년 3월에는 서남지구 전투경찰대에 여자 순경 36명이 임명돼 여경 1소대가 탄생, 전투지역에 투입되기도 했다.
이중 공비토벌 지원 임무에 투입됐던 김말녀 순경은 나주 국사봉과 순창 쌍치지구에서 총칼을 들고 싸웠고, 한 달에 경찰관 20∼30명의 시신을 수습했다. 정광남 순경도 부대 암호를 받아 소대 초소 등에 나눠주는 일을 했다.
최순례 순경은 전투경찰대를 순방하며 부상자 치료와 간호 활동에 나섰고, 차일혁 연대장 예하 여경들은 피아골과 노고단지구에서 727 독립유격대 전원을 귀순시키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무장 공비들이 득시글했던 대둔산 전투에도 여경 40여 명이 배치돼 활약했다.
20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였던 여경들은 '여경이 가지 못할 토벌대라면/정복과 정모를 갈아입고/따라서 가겠어요 제1선에/애국심에 남녀가 구별 있겠소'라는 토벌가를 흥얼거리며 공비들의 습격을 이겨냈다고 한다.
운문산전투사령부에도 대구여자경찰서 직원 10명이 김상달 경사 인솔로 파견돼 참전했다. 이들은 낮에는 행상으로 변장해 공비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밤에는 전투경찰로 식사를 준비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5일 "여경들은 6·25 전쟁에서 때로는 최일선에서 전투요원으로, 한편으로는 후방요원으로 활약했다"며 "남경과 독립하거나 합동으로 피란민의 정리와 구호, 중요시설 경비, 후방 게릴라 소탕을 위한 첩보 수집과 귀순, 선무 공작도 담당했다"고 말했다.
동란 후에는 대구여자경찰서원이 국군장교와 동거한 간첩을 검거한 일도 있었고, 문맹 퇴치와 한글 보급 등 계몽 운동에도 앞장선 것으로 평가받는다.
6·25 전쟁 중엔 경찰관 1천613명도 납북됐다. 이 중 여경도 21명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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