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들] 위컴의 '레밍', 브런슨의 '속사포'

김재현

2026-10-23 11:15:23

▲ "미국, 전두환 지지" 관제언론의 왜곡 보도 미국 고위 당국자(위컴 사령관)의 말을 인용, 미국이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와 전두환 장군의 승계를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보도한 경향신문 1면 기사. 1980년 8월 8일. <경향신문 발췌>

▲ '레밍' 발언 위컴 주한미군사령관 [연합뉴스 자료사진]

▲ '뉴스 메이커' 주한미군사령관 (서울=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이 21일 서울 용산구 몬드리안 서울이태원에서 열린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 초청 오찬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2026.10.21 yatoya@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1980년 8월 7일,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이 서울 용산 사령부 집무실로 AP통신의 테리 앤더슨 특파원과 LA타임스의 샘 제임슨 도쿄 지국장을 불렀다. 신군부의 언론 검열로 관제 발표만 쏟아지던 때였다.

위컴의 회고록 《벼랑 끝의 한국》에 따르면, 그날 만남은 한국의 실상을 자신이 직접 서방 언론에 설명하려 마련한 자리였다. 이름과 직책을 밝히지 않고 '고위 군 관계자'로 보도한다는 조건이었다. 언론 용어로 '백그라운드 브리핑', 곧 배경설명이었다.

5·18 광주항쟁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이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직을 눈앞에 두던 시기였다. 위컴은 이날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은 '레밍'(들쥐)과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뒤를 따른다며,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지 의문을 표한 것으로 보도됐다.

훗날 위컴은 회고록에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레밍'은 한국 민중 전체가 아니라 새 권력에 줄서기 바빴던 엘리트층의 행태를 꼬집은 발언이었으나, 맥락이 잘려 나간 채 기사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해명은 실제로 설득력을 지닌다. 인터뷰 상대였던 앤더슨 AP 특파원은 광주항쟁의 현장에서 진압 과정과 시민들의 참상을 보도한 기자였다. 목숨 걸고 광주의 진상을 세계에 알린 기자 면전에서 위컴이 과연 한국인 전체를 싸잡아 들쥐 근성이라고 폄훼할 수 있었을까.

의도와 달리 위컴의 야심 찬 백브리핑은 신군부의 훌륭한 선전 도구로 전락했다. 국내 언론은 일제히 '미국, 전두환 지지'라 대서특필했고, 전두환은 뉴욕타임스와 단독 인터뷰를 갖고 익명의 발언자가 위컴임을 직접 밝히며 선전 효과를 한껏 키웠다.

이로써 전두환은 미국의 공식 지지를 받은 차기 지도자로 발돋움한 반면, 위컴에게는 광주 학살을 묵인하고 한국인의 국민성까지 비하한 오만한 군인이란 평생 낙인이 덧씌워졌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의 거침없는 언행이 잇따라 외교 마찰을 빚고 있다. 한반도 지도를 돌려 보이며 중국의 시각에서 한국을 '단검'에 비유해 파문을 일으키더니, 최근에는 "유엔군사령부의 관점에서 대한민국은 DMZ 남쪽 철책선에서 시작된다"고 해 한국의 영토주권을 부정한 것 아니냐는 논란을 불렀다.

유엔사의 비무장지대 관리 책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라고는 하나, 북한이 남북을 별개의 두 국가로 규정하고 각종 도발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자신의 말이 한국민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충분히 헤아렸는지는 의문이다. 더욱이 주한미군사령관은 단순한 군 지휘관이 아니라 동맹국의 안위를 책임지는 자리다. 그 판단과 발언 하나하나가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안보 지형에까지 파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주한 미국대사보다도 더한 신중함이 요구된다.

과거 위컴 사령관은 '레밍'이라는 단어 하나로 한국인의 국민성을 폄훼하고 5공화국 출범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오명을 썼다. 그런데도 브런슨 사령관 역시 전임자의 실언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기보다 잦은 공개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고 있다. 북한의 오판을 억제하고 동맹의 신뢰를 다져야 할 최고 지휘관이라면 말 한마디에도 그에 걸맞은 무게와 신중함을 담아야 한다. 발언할 때마다 정치적 의도를 의심받고 정치권과 국민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면 한미동맹의 근간을 흔드는 안보 리스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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