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독립운동 주역 '장재성' 재평가 받나…진실위 조사 개시

박철홍 / 2023-02-12 08: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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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역할에도 좌익 활동 이력으로 서훈 보류 후 묻혀
▲ 광주학생독립운동 주역 장재성 선생 [장재성기념사업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장재성과 성진회 회원들 [장재성기념사업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장재성과 가족 [장재성기념사업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광주학생독립운동 주역 '장재성' 재평가 받나…진실위 조사 개시

지도자 역할에도 좌익 활동 이력으로 서훈 보류 후 묻혀

(광주=연합뉴스) 박철홍 천정인 기자 = "우리의 적은 일본인 중학생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정책과 노예교육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장재성의 광주학생운동을 통한 항일독립운동'에 대해 조사 개시를 결정했다.

장재성(1908~1950년) 선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전국 확산에 지도적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에도, 조선공산당 가입과 월북 회의 참석 등을 이유로 서훈이 내려지지 않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를 계기로 장 선생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지 관심이 쏠린다.

◇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장재성

구한말 일제 침략에 맞서 전국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나던 1908년 광주에서 태어난 장재성 선생은 1922년 광주 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에 입학했다.

광주고보 5학년 시절 장 선생은 동급생인 왕재일 등과 함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조직적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 학생 조직인 '성진회'를 결성했고, 그 뿌리는 '독서회'로 이어졌다.

장 선생의 누이 장매성도 당시 광주여고보에서 소녀회를 결성하는 등 함께 활동했다.

일제에 맞서 학생들의 동맹휴업(맹휴) 투쟁을 이끌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힘을 잉태한 이들은 1929년 11월 3일 운명의 날을 맞는다.

그해 10월 30일 전남 나주역에서 한·일 학생들 간 충돌로 촉발된 흐름이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독립운동으로 폭발한다.

메이지 왕의 생일 '명치일' 기념식장에서 가미카제를 부르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광주고보 학생들은 나주 학생 충돌 사건을 일방적으로 편파 보도한 신문사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고 항의했다.

이후 한국 학생을 향한 흉기 난동까지 발생하자 한일 학생은 광주역에서도 충돌했다.

난투극 현장에 한복을 입고 나타난 장 선생은 연설로 학생들을 설득해 수습하고, 광주고보생 학생총회를 개최했다.

흥분해 무장까지 하고 광주중학교를 습격하자는 학생들을 장 선생은 "우리의 적은 일본인 중학생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 정책과 노예교육이다"고 설득했다.

향후 학생 조직을 재정비하고 11월 12일 수업 시작종을 신호로 일제히 교문 밖으로 뛰쳐나와 대규모 항일 시위를 전개했다.

광주 1·2차 학생독립운동은 이후 12월 서울 등 전국으로 확산했고 이듬해 3월까지 이어졌는데, 이 같은 전국화 과정에도 장 선생이 이바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체포된 장 선생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는다.

◇ 해방 후 6·25 전쟁 시기 총살…좌익 이력 논란에 서훈 보류

이후 한반도는 광복을 맞았지만, 장 선생은 좌우 대립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1945년 광주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의장이 된 장 선생은 광주에서 우익 청년들의 테러를 당해 크게 다치고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한다.

1948년 남한 단독으로 5·10 총선거 일정이 잡히자, 평양에서는 그해 4월 김구 등이 참가한 남북 대표자 회의가, 8월 21일에는 황해도 해주에서 남조선 인민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장 선생은 이때 월북해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그는 1949년 서울에서 체포돼 7년 형을 받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된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은 후퇴하며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사상범들을 광주 동구 지산동 뒷산에서 집단 처형했는데, 이때 숨진 이들 중 장 선생도 있었다.

그의 나인 43세였고, 시신은 찾지 못했다.

4·19 혁명 직후 장 선생에 대한 복권 움직임이 있었지만, 박정희 군사 정권은 이를 기각했고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포상 대상자에서도 탈락시켰다.

2018년 정부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게도 훈포장 선정 문호를 열었지만, 장 선생은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했을 가능성 탓에 서훈이 보류됐다.

진실화해위 조사 대상에 포함되자 장재성기념사업회 측은 환영의 입장을 밝히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노성태 장재성기념사업회 이사는 "장재성 선생이 서거한 지 73년이 다 되도록 명예 회복이 안 되는 상황에서 진실화해위의 조사는 의미가 있다"며 "학생독립운동의 핵심 인물인데도 사회주의 운동가라는 이유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상황이 바뀌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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