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신부님처럼 모든 것 놓으면 자유로워져…여생은 한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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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독 작곡가 박영희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박영희 작곡가가 7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 인근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1.11.8 scape@yna.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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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독 작곡가 박영희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박영희 작곡가가 7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 인근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1.11.8 scape@yna.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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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독 작곡가 박영희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박영희 작곡가가 7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 인근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1.11.8 scape@yna.co.kr |
최양업 신부 오페라 작곡 박영희 "끝없는 사랑 알리려 했죠"
숱한 '최초' 타이틀 보유한 재독 작곡가…오페라 '길 위의 천국' 참여
"최 신부님처럼 모든 것 놓으면 자유로워져…여생은 한국에서"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이번 작품에 삶을 걸었어요. 건강이 좋지 않지만 죽기 전까지는 꼭 작품을 완성하리라 결심했죠. 최양업 신부님의 끝없는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한국 천주교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신작 오페라 '길 위의 천국' 작곡을 맡은 재독 작곡가 박영희(76)는 작품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이렇게 밝혔다.
숱한 '최초' 타이틀과 함께 세계적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은 그는 지난 7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악 인생에 얽힌 이야기를 보따리를 풀어놨다.
'길 위의 천국'은 오는 12∼13일 청주, 20∼21일 서울, 23일 광주에서 선보인다.
박 작곡가가 최 신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5년. '겸손'을 주제로 한 작품을 구상하던 중 최 신부의 서한집을 읽고 이내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최 신부가 전한 사랑을 음악으로 돌려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듬해에는 최 신부가 활동했던 충북 진천 배티성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최 신부의 어떤 면이 그토록 마음을 흔들었을까. 그는 "최 신부님은 한 번도 자신을 높이지 않았다. 온갖 고난에도 힘들다 하소연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모두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모든 것을 놓으면 자유로워진다. 최 신부님은 그렇게 사신 분이다. 그런 삶이 놀라웠고, 저를 욕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했다"고 말했다.
박영희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청주에서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음악을 좋아했던 아버지 곁에서 노래를 즐겨 부르며 음악과의 인연이 시작됐다고 한다. 아버지와 함께 간 장터에선 굿과 판소리를 접했고, 집 앞에선 해금 연주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음악인으로 성장하는 자양분이 됐다.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때부터 더는 노래를 하지 않았어요. 어린 나이지만 삶이 뭔가 싶어 불교 공부를 하기도 했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보내드리기 위해 시를 쓰고 곡을 붙이면서 작곡을 하게 됐습니다."
그는 "특히 사범학교 교사였던 둘째 언니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제가 어두워질까 봐 피아노를 배우게 했고, 학교에서 악보를 인쇄해 전해주기도 했다. 언니가 아니었으면 음악가의 길을 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박영희는 서울대 대학원 졸업 후 국내 처음으로 독일학술교류재단 장학생으로 선발돼 1974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1980년에는 현대 작곡가들의 꿈의 무대인 독일 도나우에싱겐 현대음악제에 여성 최초로 초청을 받았다.
또 1994년에는 독일어권 국가에서 여성 최초로 음악대학 정교수(브레멘 국립예술대)가 됐다. 이 대학에서 부총장까지 지내다 2011년 은퇴했다. 작년에는 여성 최초이자 동양인 최초로 독일 예술계 최고 권위의 '베를린 예술대상'을 받았다.
특히 1980년 도나우에싱겐 현대음악제에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영감을 받은 교향곡 '소리'를 초연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는 "TV로 매일 광주의 참상을 보다 저렇게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 작품을 만들었다. 왜 우리가 가슴이 아파야 하는가 질문하는 작품이다"라고 설명했다.
박영희는 자신의 음악을 '사랑'으로 정의했다. 그는 "저의 음악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서 시작해 인간의 마음으로, 또 훨씬 폭이 넓은 사랑으로 이어졌다. 이제 최양업 신부님의 끝을 알 수 없는 사랑에까지 이르렀다"고 했다.
그의 음악에는 한국적인 요소가 많다. 국악기를 사용해 서양음악에 한국의 리듬을 적용하고, 100곡이 넘는 작품 중에는 '만남' '타령' '소리' '흰 눈' '비단실' 등 한국어 제목도 많다. 한국 언어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그만큼 컸다.
그는 "저의 곡을 듣는 사람들이 잠깐이라도 한국을 알고, 한국어를 배웠으면 했다. 음악으로 우리 문화를 전해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저의 음악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마음의 안식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남은 삶은 한국에서 살고 싶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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