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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감학원 피해자 한일영 씨 20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회의실에서 만난 한일영 씨가 자신의 선감학원 원아 대장 기록을 들어 보이고 있다. [촬영 박규리] |
"국가가 앗아간 내 어린시절…선감학원 사건은 아직 진행중"
피해자 한일영씨 인터뷰…"대통령이 앞장서서 사과해줬으면"
(서울=연합뉴스) 박규리 기자 = "삼선교 인근에서 느닷없이 경찰에 붙잡혔어요. 집은 어디고, 학교도 다닌다는 얘기를 제가 다 했는데 정강이를 발로 차가면서 파출소로 무작정 끌고 가더라고요."
20일 연합뉴스와 만난 '선감학원' 인권침해 피해자 한일영(64)씨에겐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악몽처럼 남아있다. 선감학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상처투성이인 한씨의 몸이 대변한다. 혹한기 고된 노역 속에 동상에 걸려 잘려 나간 왼발 발가락도 그 가운데 일부다.
한씨의 비극은 13살이던 1971년 2월에 시작됐다. 경기도 가평 본가에서 서울 성북구 할아버지 댁으로 가던 길에 경찰에 끌려갔고, 서울시립아동보호소를 거쳐 선감학원으로 넘겨졌다. 그는 그 뒤로 5년간 집에 가지 못했다. 가족들은 그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애를 태워야 했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 경기 안산시 선감도에 설립된 선감학원에는 한씨처럼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8∼18세 아동·청소년이 즐비했다.
'부랑아 교화'를 명분으로 폭행·강제 노역 등 온갖 인권침해 행위가 자행됐다.
작업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청소년 축에 속하는 반장이 교사에게 혼나고 오는 날이면 그 반에 속한 어린아이들이 모조리 '몽둥이찜질'을 당해야 했다. 그런 때면 피가 나올 때까지 얻어맞았다고 한씨는 회고했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서로를 학대하는 시스템을 묵인·방조했다.
한겨울에도 쉼 없이 이어지는 강제 노역은 아이들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한씨는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는데 저는 발을 볼 때마다 그 기억이 떠올라 도무지 잊을 수가 없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한씨는 18세가 된 1976년 바닷물이 빠지는 시간대를 골라 목숨 걸고 선감학원을 탈출했다. 한씨처럼 탈출을 감행한 수많은 아이가 그 과정에서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한씨에게 선감학원 사태는 현재 진행형이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그의 이후 삶까지 옭아맸다.
그는 "당시엔 노역이랑 구타가 가장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 배움의 기회를 빼앗긴 게 무엇보다 큰 상처가 됐다"고 말했다. 정상적인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에게 제대로 된 일자리가 주어질 리도 만무했다. 그렇게 통한의 세월을 감내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한씨를 비롯한 선감학원 인권침해 피해자 176명의 요청을 받아들여 진실 규명을 결정했다. 반세기 만에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피해를 인정한 것이다.
진실화해위는 당시 부랑아 대책을 수립해 무분별한 단속을 주도한 법무부·행정안전부·보건복지부 등 관련 정부 부처와 단속 주체였던 경찰, 선감학원을 운영한 경기도 등에 공식적인 사과를 권고했다.
한씨도 이번 진실화해위 결정이 피해자들의 틀어진 삶과 명예를 조금이나마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 시작은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책임자의 진정한 사과라고 한씨는 힘줘 말했다.
한씨는 "피해자 대부분이 고령인 만큼 조속한 정부의 공식 사과와 피해자 지원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며 "진심 어린 사과가 피해자들 스스로 트라우마를 극복할 힘을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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