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공작원이 안겨주는 지독한 쓸쓸함…'와일드 호스 나인'

정래원

2026-10-31 08:01:01

마틴 맥도나 감독 신작…블랙유머 속에 담긴 삶의 부조리
존 말코비치, 괴팍한 CIA 요원 열연…베네치아 남우주연상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 속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 속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 속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 포스터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정래원 기자 =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던 남녀가 어느새 사랑에 빠지는 것은 로맨틱 코미디의 오랜 공식이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신작 '와일드 호스 나인'은 로맨스 영화는 아니지만 관객에게 비슷한 경험을 선사한다.

관객은 불쾌하고 짜증스러운 인물의 전형인 크리스(존 말코비치 분)에게 눈살을 찌푸리다 어느새 마음을 빼앗기고, 마지막에는 넋을 놓을 만큼 먹먹함을 느끼게 된다.

'와일드 호스 나인'은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의 마지막 여정을 통해 인간의 모순과 삶의 부조리를 들여다보는 블랙코미디다.

영화의 중심에는 좀처럼 호감을 갖기 어려운 인물 크리스가 있다.

그는 상대방의 성별이나 인종, 정치적 신념을 가리지 않고 조롱거리로 삼는다. 남성 중심적인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고, 상대가 불쾌해하든 말든 자기 말에 취해 떠들어댄다.

미국 정보기관의 핵심 요원으로 살아온 크리스의 경력도 불편함을 더한다.

국가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살인에 가담해온 그는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도 좀처럼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불편한 순간마다 농담을 던져 상황을 희화화하는, 일관되게 밉살맞은 인물이다.

영화의 큰 반전은 절대 엮이고 싶지 않은 대표적 인간상인 크리스에게 점차 마음이 열린다는 점이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끝없는 농담 사이로 불안과 후회, 외로움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무너지게 한다.

크리스 역을 맡은 존 말코비치의 연기는 한 인물을 향해 깊은 반감과 연민을 동시에 품게 하는 데 크게 일조한다.

존 말코비치는 괴팍함과 능청스러움, 천진함과 애잔함을 오가는 크리스를 마치 다큐멘터리 속 실존 인물처럼 생생하게 표현해냈다. 그는 이 역할로 제83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 볼피컵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샘 록웰이 연기한 리와의 호흡은 두 사람이 수십년간 목숨이 오가는 비밀 작전을 함께 수행해 온 전우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납득시킨다.

서로를 가족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다정한 말 한마디 못 하는 두 남자의 우정은 한심하면서도 사랑스럽다.

크리스의 마지막 여정이 펼쳐지는 이스터섬의 풍광도 인상적이다.

태평양 한가운데 자리한 이스터섬에는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거대한 모아이 석상이 남아 있다.

드넓은 초원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야생마들도 영화의 주요 소재다. 평생 조직의 명령에 따라 살아온 크리스의 인생과 대비되는 풍경이기도 하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배급사를 통해 전한 인터뷰에서 "이스터섬 자체가 하나의 인물처럼 느껴져야 했다"며 "그래서 그 풍경을 제대로 담기 위해 드론 촬영과 이동 장면에 충분한 시간을 들였다"고 설명했다.

단편영화 '식스 슈터'(2005)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마틴 맥도나 감독은 '쓰리 빌보드'(2018)와 '이니셰린의 밴시'(2023)로 베네치아국제영화제 각본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이번 작품에서는 1973년 칠레의 군사 쿠데타를 둘러싼 정치적 음모를 특유의 블랙 유머로 풀어냈다. '쓰리 빌보드'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은 샘 록웰과도 다시 호흡을 맞췄다.

'와일드 호스 나인'은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 유력 후보로 꼽히며, 베네치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존 말코비치의 오스카 수상 가능성도 거론된다.

11월 4일 개봉. 116분.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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