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진에 얽힌 몸·사라지는 전쟁의 기억…고이즈미 메이로 개인전
박의래
2026-10-26 17:07:48
아트선재센터서 '버티컬즈'·최하늘 개인전 등 3개 전시도 개막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사람의 팔과 다리가 자동차 엔진에 뒤엉켜 있다. 엔진을 중심으로 여러 신체 부위가 뒤틀린 채 뻗어 나가고, 기계와 인간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생명체의 몸인지 기계의 일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이 기묘한 조각 작품은 기술의 발전 속에서 인간의 몸과 존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탐구하는 일본 작가 고이즈미 메이로(50)의 조각 '비의'(秘儀)다.
고이즈미의 국내 첫 미술관 개인전 '고이즈미 메이로: 불, 어느 아카이브'가 오는 27일부터 12월 27일까지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다. 일본의 전쟁과 민족주의 역사를 중심으로 폭력의 기억이 세대를 거쳐 전해지고, 되새겨지거나 사라지는 과정을 살피는 자리다.
일본 요코하마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고이즈미는 영상과 퍼포먼스, 가상현실(VR)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은폐된 역사적 기억과 국가주의, 역사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심리적 조건을 탐구해왔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역사가 집단적 기억에서 서서히 지워지는 '사회적 망각'에 주목한다. 공식 기록만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경험이 목소리와 몸짓, 비자발적인 신체 반응에 어떻게 남는지 살핀다. 작가는 신체를 과거를 재현하는 도구가 아닌, 기록 바깥의 경험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아카이브로 본다
조각 '비의'는 자동차 엔진에 신체 일부를 본뜬 레진을 결합한 작품으로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에서 제작됐다. 인간의 몸이 기계적 시스템이나 사물, 데이터의 집합처럼 이해되는 현실을 짚는다.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은 작가는 "여러 개의 팔과 손을 가진 모습은 인간이 자신의 힘보다 더 큰 힘을 욕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며 "기계와 결합한 인간이지만 어딘가는 어긋나는 불편한 상태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상 작품 '증언의 천사들'은 과거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기억이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해지는지 탐구한다. 이 작품은 2021년 영국 현대미술상 아르테스 문디 9을 공동 수상했다.
세 화면이 동시에 재생되는 작품으로, 가운데 화면에는 1942∼1944년 중국에서 복무한 일본군 참전 군인 곤도 하지메(1920∼2021)의 인터뷰가 나온다. 양쪽 화면에는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퍼포머 11명이 곤도의 증언을 외워 도쿄 시내에서 낭독하는 장면이 담겼다.
곤도는 과거 자신이 속한 부대가 저지른 민간인 살해와 성폭행 등을 뒤늦게 증언했다. 하지만 99세 때 촬영한 인터뷰에서는 관련 기억을 상당 부분 잃은 상태였다. 영상 말미에는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면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모습이 담겼다.
퍼포머들은 증언을 낭독하다 대사를 잇지 못해 멈췄다가 다시 시작하고 같은 대목을 반복하기도 한다.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과거를 다른 세대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머뭇거림과 지친 몸은 기록으로 남은 증언에 생생한 실감을 더한다.
고이즈미는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지만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인 만큼 여러 곳에서 이 작품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가·건축가 7명이 참여하는 '버티컬즈'와 김희천·이하령·홍승택의 '2mc1dj: 사건 볼륨 3', 조각가 최하늘의 개인전 '최하늘: 이갈이'도 같은 날 아트선재센터에서 개막한다.
'버티컬즈'는 상승과 권위, 힘을 상징하며 남성성의 은유로 읽혀온 '수직성'을 재해석하는 전시다. 구나·김민훈·이다미·이립·전우진·최고은·황수연이 여성과 퀴어의 신체와 감각을 바탕으로 조각과 설치를 통해 '서 있음'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2mc1dj: 사건 볼륨 3'은 약 96분짜리 '화면 없는 영화'다. 가상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을 배경으로 대사와 음악, 효과음만으로 극을 이끈다.
'최하늘: 이갈이'는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 움직이는 몸에 주목한다. 작가의 첫 키네틱 작업을 포함한 신작 조각 12점으로 몸과 의식의 관계를 되묻는다.
'2mc1dj: 사건 볼륨 3'은 12월 6일까지, 나머지 세 전시는 12월 27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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