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작은 '수사반장'…"시그널 주제곡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 세상 이치 깨달아"
"'전원일기'서 그늘 넓은 느티나무 같은
![배우 최불암 [최불암 측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https://korean-vibe.com/news/data/20261030/yna1065624916272156_677.jpg)
![배우 최불암 출연작 '수사반장'의 한 장면 [MBC 유튜브 '옛드' 갈무리. 재판매 및 DB 금지]](https://korean-vibe.com/news/data/20261030/yna1065624916272156_45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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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장진리 기자 = 30일 87세를 일기로 별세한 배우 최불암(본명 최영한)은 70년 가까이 소탈한 이웃의 얼굴을 대변했다.
인간미 있고 정의감 넘치는 수사반장부터 근엄한 가장과 따뜻하고 인자한 아버지, 농촌 마을 공동체를 지키는 회장까지 바로 곁에 있는 서민의 삶을 친근하게 소화했다.
1959년 연극 무대에서 데뷔해 국립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그가 TV 드라마로 시청자를 만난 건 1967년 서울중앙방송(현 KBS) '수양대군'이 처음이다.
20대 후반에 50대의 장군 김종서를 연기하며 안방극장에 등장한 그는 젊은 시절부터 노역을 맡았다.
2년 후 30살에 MBC '역풍'(1969)에서 80대 노인을, 40대 초반에 '제1공화국'(1981∼1982)에서 80대의 이승만 전 대통령을 연기하며 실제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인물을 도맡았다.
최불암은 2007년 낸 에세이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배우라는 오래된 대사에 관하여'에서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해서 속상한 적은 있었어도 멋진 배역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실망한 적은 없었다"고 돌아봤다.
그는 '수사반장'(1971∼1984, 1985∼1989), '전원일기'(1980∼2002) 등 장수 드라마를 통해 시대와 함께 살아가는 국민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수사반장'에선 정의롭고 인간미 넘치는 주인공 박영한 반장을 연기했다. 급속한 산업화·도시화가 부른 범죄 사건의 이면을 다루며 평범한 사람들의 애환과 형사의 인간적 고뇌를 함께 담아냈다.
최불암은 여러 방송과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생작'으로 '수사반장'을 꼽았다.
2017년 출연한 KBS 2TV 예능 '1대100'에선 '수사반장'과 '전원일기', 시사 교양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 중 "젊은 시절 열심히 한 작품"이라며 '수사반장'을 언급했다.
그는 에세이에서 "'수사반장' 시그널 주제곡을 들으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수사반장'에 출연하며 세상 이치를 깨달은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라고 회상했다.
'수사반장'은 짙은 인류애가 느껴지는 스토리와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수사관들의 모습으로 당시 부정적이었던 경찰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최불암에게 사건을 수사해달라고 방송국을 찾아오는 시민들도 있었고, 현역 경찰관은 최불암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때론 전과자들이 찾아와 도움을 청해 최불암이 "행상이라도 하라"고 리어카를 사주고 마음을 다독여 돌려보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최불암은 1972년 처음 명예 경찰에 위촉됐고, 2024년엔 민간인 중 처음으로 명예 국가수사본부장(치안정감)이 됐다.
'수사반장'은 최불암에게 큰 책임감을 심어주는 계기도 됐다. 술과 친구를 좋아했던 최불암은 1997년 한 인터뷰에서 "'수사반장'에 출연하면서 술 취미가 사라졌다. 난 인생을 다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드라마에서 배운 게 많았다"며 "치안을 책임지는 안방의 보안관이자 사회를 계도하는 큰 어른 역할의 연기자가 매번 술에 취해 비틀거릴 수는 없다"고 달라진 마음가짐을 털어놨다.
'전원일기'에선 농촌과 가족 문화 변화의 중심에 선 가장이자 마을의 큰 어른인 김민재 회장을 연기하며 '국민 아버지'로 불렸다.
김혜자가 인지한 아내 이은심 역으로 그와 부부로 호흡을 맞췄고, 김용건이 고지식한 장남 김용진을, 유인촌이 우직한 차남 김용식을 연기했다. 며느리로는 고두심, 박순천이 출연했다.
김 회장은 농촌 마을인 양촌리에서 노모를 모시며 양자까지 세 아들 내외와 손주들을 거느린 대가족의 가장이었다. 집안에선 근엄하면서도 자애로운 아버지였고, 마을에선 사람들이 집안일, 벼농사 등 대소사를 모두 의논하는 사려 깊은 어른이었다.
또한 핵가족화가 시작된 당시 시대에 훈훈한 정이 넘치는 대가족의 의미를 전하는 한편, 시청자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정신적 고향 같은 역할을 했다.
최불암은 에세이를 통해 "'전원일기'에서 '그늘 넓은 느티나무' 같은 아버지를 보여 주고 싶었다. 명절이면 온 동네 사람들 세배를 받고, 먼 길을 돌아 고단한 심신으로 고향을 찾은 마을 청년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크고 작은 일에 용기와 지혜를 빌려주던 어른의 모습을 드라마에서라도 그려 내고 싶었다"고 했다.
최불암은 남의 집 안방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듯한 연기를 지향점으로 삼았다. "배우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을 대신해야 한다"며 솔직하고, 진실하게, 거짓 없이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연기 철학이었다.
이를 위해 인물의 특성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분석하고, 캐릭터의 습관과 성격까지도 세심하게 설정했다.
'수사반장'의 박영한은 강력계 형사의 상징인 권총, 수갑 대신 트렌치코트, 하얀 손수건, 담배 네 개비를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웠다.
그는 5월 방송된 MBC 다큐에서 "어머니께서 방송을 모니터링해주시면서 '범인을 권총이나 수갑이 아닌 정신으로 다스려야 국민들이 호응해서 네게 박수를 쳐 주지 않겠냐'고 하셨다"며 극 중 인간미를 보여주는 소품을 사용하게 된 계기를 밝히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수사반장'을 매주 챙겨볼 정도로 팬이었다. 육영수 여사는 생전 최불암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남편과 국민의 건강이 염려된다며 "담배 피우는 장면을 조금 줄이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최불암은 이를 두고 "이때 받은 전화가 내게 평생 교훈이 됐다"며 "내가 나쁜 행위를 하면 국민들도 따라서 한다는 건 무섭고도 두려운 제약"이라고 회고했다.
'전원일기'에선 구멍 난 러닝셔츠를 입고 군불로 탄 듯한 아랫목을 지키는 아버지의 자리를 표현하기 위해 직접 장판에 컬러 스프레이를 뿌렸다가 방송국 소품팀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최불암은 에세이에서 "'수사반장'은 내 연기를 다진 초석 같은 작품, '전원일기'는 나를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비상시켜 준 빛나는 날개 같은 작품"이라고 돌아봤다.
그는 '빛과 그림자'(1967)를 비롯해 '여마적'(1968), '만종'(1970), '파계'(1974), '영자의 전성시대'(1975), '왕십리'(1976), '진짜진짜 좋아해'(1978), '바람불어 좋은날'(1980),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까불지마'(2004), '잠복근무'(2005)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파계'에선 법통을 승계하려는 고승을, '달려라 만석아'(1979)에선 옛것을 지키려는 아버지를, '사람의 아들'(1980)에선 살인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형사를, '최후의 증인'(1980)에선 6·25 전쟁의 상흔을 가슴에 품고 사는 노인을 연기하며 스크린을 빛냈다.
1980년대 이후로는 드라마에 집중했다. 그는 "영화는 내 몫이 아니라는 판단"이라며 "1980년대부터 영화를 내 좁은 등에서 내려놓았다. 일부러 영화 출연을 피한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의 연기 인생에서 김혜자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김혜자와는 '개구리 남편'(1969∼1970)을 시작으로 '궁'(2006)까지 수많은 작품을 함께하며 '콤비'로 불렸다.
'전원일기'에선 22년간 부부를 연기했고, '강남가족'(1974), '신부일기'(1975∼1976), '당신'(1977∼1978), '안국동 아씨'(1979∼1980), '어제, 그리고 내일'(1982∼1983), '홍소장의 가을'(2004), '궁' 등의 드라마에서 진짜 부부 같은 연기를 보여줘 두 사람을 실제 부부로 착각하는 시청자도 부지기수였다.
연기를 향한 도전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지막회 시청률이 66.9%에 달했던 '그대 그리고 나'(1997∼1998)에선 평생을 낭만 속에서 살아온 '캡틴 박' 박재천을 연기했다. '수사반장'의 휴머니스트, '전원일기'의 아버지 상을 벗어던진 그는 터프하고 섹시하기까지 한 남성미로 안방을 휩쓸었다. 이경진, 박원숙과 함께 연기한 중년의 삼각관계는 결말을 두고 시청자 투표가 벌어질 만큼 뜨거웠다.
동료 배우 오지명이 영화 '까불지마'(2004)로 처음 메가폰을 잡자 20여년 넘게 멀리하던 영화에 다시 도전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친근함과 유쾌함을 더한 노년의 코믹 액션 연기로 변신을 시도했다.
SBS 드라마 '식객'(2008)에선 아홉 달 동안 이발도 포기하며 만든 꽁지머리, 간드러진 하이톤의 목소리, 섬세한 손동작으로 궁중요리 권위자 오숙수를 파격적으로 소화했다.
최불암은 2014년 SBS 드라마 '기분 좋은 날' 출연 후 2018년 25년 만에 연극 '바람 불어 별이 흔들릴 때'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한동안 연기 활동을 중단하다시피 했다.
그는 SBS 예능 '집사부일체'에 출연해 "은퇴가 아니라 물러남"이라고 표현하며 "제작진이 연기에 대한 지적보다는 날 어려워만 하니 스스로 발전이 없다고 느껴져 그만두게 됐다"고 소신을 밝혔다.
그가 마지막으로 연기를 선보인 작품은 '수사반장 1958'(2024)이다. 이 드라마는 '수사반장'의 프리퀄(시간상 앞선 이야기를 다룬 속편)로, 최불암이 '수사반장' 속 박영한을 다시 연기해 시청자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이제훈이 박영한의 손자 박 형사와, 박영한이 반장이 되기 전인 청년 시절을 모두 연기했다.
최불암은 '수사반장 1958'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며 시대를 넘어 두 작품을 연결했다. 정의로운 경찰이 된 손자와 후배 경찰들을 격려하고, 이미 고인이 된 동료들의 무덤을 찾아가 경례와 함께 눈물로 "안녕"을 고하는 모습에 '수사반장'의 진정한 마무리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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