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를 상징하는 대표 역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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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에서 본 상당산성 서문 일대[사진/임헌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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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당산성 남문 성벽[사진/임헌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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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성 내 저수지[사진/임헌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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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태체험장이 조성돼 있는 옛 다랑논[사진/임헌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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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문 누각[사진/임헌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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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옹성[사진/임헌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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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성[사진/임헌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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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문과 동장대 일대[사진/임헌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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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문 야경[사진/임헌정 기자] |
[걷고 싶은 길] 가을 예감 청주 상당산성 둘레길
청주를 상징하는 대표 역사 유적
(청주=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충북의 심장' 청주의 역동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상당산성에 올라야 한다.
산성에 서면 청주를 남북으로 흐르는 미호강과 그 지류인 무심천, 청주의 진산인 우암산, 중부 거점 공항인 청주국제공항, 오창과학산업단지, SK하이닉스 청주 사업장, 청주 시민의 보금자리인 빽빽한 아파트 단지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연보라색 벌개미취가 곱게 핀 상당산성은 가을을 예고하고 있었다.
◇ 한국은 '산성의 나라'
한양 외곽 방어 기지였던 북한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 국내 최대 산성인 부산 금정산성(옛 동래 산성), 신라 시대 3년 만에 완공된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 몽골을 저지하기 위해 구축했던 강화산성, 행주대첩의 무대 행주산성, 온달장군이 쌓았다는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 ….
누구든 산성 몇 개쯤은 수월하게 꼽을 정도로 한국에는 산성이 많다.
한반도 남한에만 1천200여개의 크고 작은 산성이나 산성 터가 남아 있다. 한국이 '산성의 나라'라고 불리는 까닭이다.
산악 지대에는 산세를 활용한 군사 시설인 산성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처럼 많은 산성 및 그 터가 남아 있는 나라는 흔하지 않다.
한국에 산성이 다수 축조된 것은 국토의 70%가량이 산지여서 군 요새를 구축할 때 지형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던 데다, 고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영토 각축전을 벌인 때문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삼국 접경지인 충청 지방에는 특히 산성이 많았다.
충북의 경우 남아있는 산성 및 산성터가 200여개에 이른다.
청주 토박이인 신영식 문화관광해설사는 오래전부터 주변 산에 자주 다녔다며 "어릴 적 소풍 같던 산을 포함해 대부분의 산에서 상당산성처럼 크지는 않더라도 산성이나 그 흔적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고 전했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상당산성
청주의 파수꾼
상당산성을 비롯해 삼년산성, 온달산성, 충주산성, 장미산성(충주), 덕주산성(제천), 미륵산성(괴산) 등 충북의 7개 산성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다.
이들은 고대, 중세, 근대에 지어졌거나 개축된 한국 산성의 주요 특징을 보여주는 데다 원형이 잘 남아 있어 축성 당시의 토목, 건축, 군사 기술을 알게 한다는 것이 등재 이유였다.
이 산성들은 지형을 활용하고, 산과 강을 잇는 교통 이점을 살려 독특한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기도 하다.
가령 상당산성은 북쪽 지형이 별도의 방어 시설이 필요 없을 정도로 험하고 가파르다. 그래서 상당산성에는 북문이 없다.
온달산성은 남한강이 크게 휘돌아가는 요충지에 있다. 육상 교통 수단이 변변치 못해 수운에 의존했던 시대에 강은 현대의 고속도로만큼이나 중요했다.
백제나 통일 신라 때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상당산성은 청주를 상징하는 역사 유적이다.
상당산(해발 491m)이 머리에 띠나 왕관을 두른 듯 멀리서도 성곽이 뚜렷하게 관찰되는 상당산성은 위기 때마다 청주 사람들의 울타리가 되어준 파수꾼이다.
상당산성은 규모가 크고 내부 면적이 넓다.
성곽 둘레는 약 4.2㎞, 넓이는 축구장 100개를 합친 것보다 큰 약 20만 평이다.
◇ 역사 배움터·시민 휴식처…상당산성 둘레길
상당산성은 박제된 과거 유물에 머물러 있지 않다.
현대인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져, 현재와 과거가 소통하는 역사 현장이다.
동시에 바쁜 도시인들이 잠시나마 일상에서 벗어나 쉬어가는 쉼터이기도 하다.
산성은 청주 시가지에서 약 8㎞ 정도 떨어져 있다. 자동차로 30분 정도면 닿을 수 있어 주말은 물론이고 주중에도 방문하는 등산객, 산보객, 가족, 연인들이 많다.
이를 증명하듯 산성 안에는 깔끔한 식당가가 있었고, 평일인데도 식당에는 손님들이 붐볐다.
식당가는 꽤 큰 저수지와 한옥마을 사이에 있었다.
옛날에는 산성 내 식수와 생활·농업 용수를 공급했던 저수지가 4∼5곳에 달했다.
산성이 주요 군사 시설로 기능했던 조선 시대에 산성 안 인구 및 시설을 저수지 규모로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조선 영조 때 산성의 주둔군은 238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을 보조한 승병을 포함하면 많을 때는 약 3천500명이 이 산성을 지켰다고 한다.
저수지 가까이 있는 옛 다랑논에는 생태 체험장이 조성돼 있었다.
상당산성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으나 산성 둘레길 걷기는 남문에서 시작해 원점 회귀하는 것이 보통이다.
둘레길은 성곽 길이와 비슷한 4㎞ 남짓이지만, 성곽 안쪽에 숲길이 촘촘하게 나 있어 둘레길과 숲길을 섞어가며 거닐 수 있다.
길은 평지보다는 조금 더 가파르고, 본격 등산로보다는 평탄해 가벼운 산행 기분으로 걸을 수 있었다.
주 성문인 남문 앞에 펼쳐진 드넓은 잔디밭은 이곳이 역사 문화재와 휴식 공간이 어우러진 사적공원임을 말하고 있었다.
잔디밭은 소풍, 결혼사진 촬영 무대가 되고, 겨울에는 눈썰매장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성곽 높이는 4∼5m로 보였다. 정식 명칭이 공남문인 남문에 들어서면 곧바로 옹성과 마주하게 된다.
옹성은 적에게 성문을 내주지 않기 위해 반원형이나 ㄷ자형으로 쌓은, 작은 성 모양의 성곽 시설이다.
한양 도성의 동대문, 남한산성, 수원화성 등에서 볼 수 있다.
옹성은 대부분 성문 바깥에 설치되나 공남문의 옹성은 성 안쪽에 지어진 드문 사례였다.
공남문 바깥의 공간이 좁아 옹성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안쪽에 지어졌다.
성곽 둘레길을 서쪽으로 돌면 공남문에 이어 치성, 서남 암문, 서장대, 서문, 수구, 동북 암문, 동문, 동장대를 차례로 만나게 된다.
치성은 외부로 돌출시켜 쌓은 성벽이다. 적의 접근을 일찍 발견하고 사격하기에 유리한 시설이다. 암문은 적이 알 수 없도록 성곽의 후미진 곳에 뚫어 놓은 작은 문이다. 사람과 가축이 지나다니고 양식을 나르던 통로이다.
장대는 대장의 지휘소이다. 성 전체 상황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곳에 주로 설치한다.
수구는 빗물이 성안에 고이지 않도록 만든 배수 시설이다. 상당산성의 주요 시설은 동·서·남쪽의 성문 3곳, 암문 2개, 치성 3곳, 장대 2곳, 수구 3개소였다.
상당산성의 이름은 백제 때 이곳이 상당현에 속했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의 최초 축조 시기를 백제 시대로 보는 이유이다.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의 아들인 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통일 신라 때 처음 쌓은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청주는 통일 신라 때 9주 5소경 중 하나였던 서원경이었다. '청주'는 고려 때부터 불린 지명이다.
현재의 돌로 된 성곽은 조선 시대에 그 원형이 만들어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른 뒤 숙종은 일본의 재침에 대비해 이곳을 중부 내륙의 국방 거점으로 삼았고, 대대적으로 성곽을 보강했다.
성은 영조 때 완공됐다. 상당산성은 조선 중·후기 석성의 형태가 잘 남아있는 유적으로 꼽힌다.
◇ 청주 읍성과 상당산성은 네트워크 방어 기지
산성은 도성이나 읍성이 위태로울 때 최후의 항전을 벌이는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한다.
읍성이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면 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하게 되는데, 상당산성은 청주 읍성의 함락에 대비한 시설이었다.
한양 도성을 지키지 못할 사태에 대비해 숙종이 북한산성을 튼튼하게 다시 쌓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산성은 구조에 따라 크게 테뫼식과 포곡식으로 나눈다.
테뫼식은 산꼭대기를 테두리 두르듯 빙 둘러싼 성곽이다.
포곡식은 계곡이나 푹 꺼진 분지를 둘러싼다. 상당산성은 넓은 분지와 골짜기를 가운데 두고 있는 거대한 포곡식 산성이다.
상당산성은 한남금북정맥으로 불리는 산줄기의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한남금북정맥은 백두대간과 한남정맥, 금북정맥을 이어주는 중간 산줄기이다.
백두대간에 속한 속리산에서 시작해 서북쪽으로 뻗어 나가다가 안성 칠장산에서 한남정맥, 금북정맥으로 나눠진다.
'한남'은 한강의 남쪽, '금북'은 금강의 북쪽이라는 뜻이다.
한남금북정맥의 북쪽은 물이 금강으로, 남쪽은 물이 한강으로 흘러간다.
다시 말해 이 산줄기는 한강과 금강을 나누는 분수계이다.
◇ '첨단'의 요람…청주
교육 도시로 이름 높았던 청주의 이미지는 맑고, 깨끗함일 듯하다.
청주의 참모습에 다가서려면 이에 더해 청주가 첨단 기술과 산업의 요람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주는 현존하는 금속활자본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지'가 간행됐던 곳이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은 청주에 있었던 흥덕사에서 1377년 인쇄됐다.
직지는 인류 문화사에 끼친 영향과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이 책은 상권이 전하지 않고 하권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흥덕사는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흥덕사 터에 건립된 고인쇄박물관은 탐방객이 많은 명소이다.
청주 중앙공원 옆 옛 용두사 터에는 1천여 년 전에 만들어진 철 당간이 있다.
당간은 절에서 기도나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깃발을 달아 세우는 기둥이다.
국보인 이 당간에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세웠다는 당기가 뚜렷하게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철제 당간은 전국에 오직 3개 남아 있는데, 당기가 명확한 것은 용두사지 철 당간이 유일하다.
신영식 해설사는 청주에서 직지가 인쇄된 것은 우연이거나 평지 돌출성 사건이 아닐 것이라며 금속을 잘 다뤘던 이 지역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주 대표 기업인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 인공지능(AI) 반도체의 산실로, 세계 첨단 산업계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청주 지역 경제를 이끄는 기관차이기도 하다.
지방소멸 우려를 거부하며, 인구와 고용이 증가하고 산업이 고도화되고 있는 청주는 오래전부터 첨단을 추구하는 유전자(DNA)를 품고 있었는지 모른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10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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