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힙스터] 빛나지 않아 더 빛나는 '제주 숨옹기'…강승철 도자공예 명장
박지호
2026-11-08 06:45:03
물허벅이 와인 칠러·파스타 볼·커피 드리퍼 등 식기로 진화
[※ 편집자 주 = K-컬처가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 시대, 우리 전통의 맥을 묵묵히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행보다 자신만의 개성과 가치를 추구하는 '힙스터'처럼 한길을 걸으며 한국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온 이들입니다. 연합뉴스는 명인·명장부터 새로운 감각의 젊은 전승자까지 전국 각지에서 전통과 지역의 가치를 재창조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매주 한 차례 조명합니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만약 우리가 유약을 발라 반짝이는 흔한 도자기를 구웠다면 사람들이 경기도 이천이나 여주로 가지 굳이 제주까지 찾아오지 않았을 겁니다. 유약을 전혀 쓰지 않기 때문에 1천200도 가마 속에서 참나무 재가 내려앉으며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눈물' 자국이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장식이 됩니다. 저는 이 먹빛 표면에 담긴 조화를 '밤의 풍경'이라고 부릅니다."
한라산 북쪽 아래 첫 마을인 제주시 해안동 주르레마을의 복합문화공간 '담화헌(談話軒)' 뒤편.
2박 3일 동안 1천200도를 넘나들던 장작가마의 불길이 멈추고,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가마 입구에서 장인이 내화벽돌을 하나씩 걷어내기 시작했다.
외부에 단 한 번도 공개한 적 없던 가마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자, 어두운 화구 속에서 깊은 먹빛을 머금은 옹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자기의 광택막을 만드는 유약(잿물)을 단 한 방울도 쓰이지 않았음에도, 그릇 표면에는 화구에서 날아오른 재가 흙 속의 철분과 만나 자연스럽게 유리질화되면서 신비로운 부정형의 무늬를 수놓고 있었다.
제주 고유의 전통 '숨옹기' 제작 과정을 복원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온 제주도 도자공예 명장 강승철(54·담화헌 대표·제주옹기숨미술관 관장)씨가 빚은 옹기들이 불가마를 견디고 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을 10월의 마지막 날 함께 지켜봤다.
◇ '노출 콘크리트' 닮은 무광의 미학…흙의 본질에서 찾은 세련미
흔히 옹기라고 하면 장독대 위에서 번들거리는 갈색 항아리를 떠올리지만, 강 명장이 빚어낸 제주 옹기는 빛을 거의 반사하지 않는 차분한 무광의 표면결을 지녔다.
육지 옹기 제작방식과 달리 유약을 일절 쓰지 않고, 철분 함량이 5∼7%에 달하는 제주의 화산 점토와 불꽃의 힘만으로 구워내는 '무유 번조(無釉 燔造)' 방식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마치 현대 건축에서 마감재를 덧대지 않고 소재 본연의 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노출 콘크리트 공법이 세련미의 상징이 됐듯, 유약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치장을 걷어낸 제주 옹기의 민낯은 현대인들에게 가장 모던한 미감으로 다가간다.
최근 그가 심혈을 기울이는 작품은 달항아리를 제주 옹기 기법으로 재해석한 '먹 달항아리'다. 작업실 바닥을 파고 묻은 전통 발물레를 돌려 형태를 잡고, 유약 없이 검게 구워낸 그의 달항아리는 불길의 세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휘어진 비대칭의 곡선과 묵직한 흑갈색 질감이 어우러져 현대 미술 오브제 같은 기품을 뿜어낸다.
이러한 제주 옹기의 독창적인 아름다움은 국내외 예술계와 라이프스타일 시장이 먼저 알아봤다.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의 건축 철학을 기리는 이타미준뮤지엄의 2024년 초대전 당시, 미술관이 자리 잡은 빌레(돌밭) 지형에 맞춰 옛 탑동의 사라진 검은 먹돌밭인 '바당밭'을 형상화한 강 명장의 작품은 미술관 마당에 영구 소장됐다.
한국적 미감을 현대화하는 패션·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이새(ISAE)'도 그의 옹기에 매료돼 10년 넘게 인연을 맺으며 화병과 아로마 램프 등을 선보이고 있다.
◇ 끊어질 뻔한 천년의 맥…험난한 4대장 기술 복원과 통합 생산체제 구축
강 명장의 작품이 오늘날 미적 완결성을 인정받으며 재조명되고 있지만, 제주 옹기는 한때 명맥이 완전히 끊어질 뻔한 위기를 겪었다.
1960∼70년대 상수도 보급과 플라스틱 용기의 등장으로 생활 환경이 급변하면서다.
멀리 샘에서 용천수를 긷는 데 사용했던 물허벅은 꼭지만 돌리면 물이 콸콸 나오는 상수도에 밀려 쓰임새를 잃었고, 언제든 필요한 만큼 장을 사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장독의 수요도 끊겼다.
과거 제주 옹기는 그릇을 빚는 '질대장', 흙판을 늘리는 '건애장', 가마를 쌓는 '굴대장', 가마의 불길을 다스리는 '불대장'의 철저한 분업 체계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수요 절벽 속에 생계마저 위협받던 원로 장인들이 잇따라 타계하면서 분업의 고리가 끊겼고, 기법 자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대학에서 도자공예를 전공했던 강 명장은 1990년대 후반부터 제주 전역의 옛 가마터를 답사하고 생존해 있던 원로 대장들을 찾아다니며 사라져가는 기술을 채록했다. 또 원로 수집가 이기정 선생이 평생 모은 옛 옹기 유물과 옹기와 관련된 옛 사진의 뒷이야기를 탐구하며 장인들의 비법을 추적했다.
그는 과거 네 명의 장인이 나눠 맡던 공정을 홀로 감당하기 위해 양질의 흙이 묻힌 서귀포시 강정동과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용수리 등을 찾아다녔다.
돌과 풀이 섞인 거친 제주 흙의 입자를 고르게 걸러내려고 방앗간에서나 볼 법한 고추 빻는 기계를 개조해 쓰다가, 육지의 한 공장에서 가압식 탈수여과기(필터프레스)를 구해 와 작업실 지붕을 뚫고 들여놓기도 했다. 닳고 닳은 건고추 빻는 기계들은 쓰임새를 다한 지금도 그의 땀방울을 증언하듯 미술관 한편을 지키고 있다.
◇ 1천200도 고온으로 진화한 '21세기 검은굴'…가볍고 단단한 생활 옹기로
강 명장은 어렵게 복원해 낸 기술을 전통의 경계 안에만 가두지 않았다.
과거 제주의 전통 가마는 고온의 '노랑굴'과 저온(900도 안팎)의 '검은굴'로 나뉘었는데, 옛 검은굴에서 구운 검은옹기는 온도가 낮아 물이 새고 쉽게 깨져 시루나 화로 등 제한된 용도로만 쓰였다.
강 명장은 아내인 도예가 정미선씨, 일본 야마가타현 출신으로 미학을 전공한 뒤 한국으로 와 10년 넘게 합을 맞춰온 스태프 아유미씨, 옹기 제품의 포장과 판매를 맡고 있는 강형선씨와 함께 담화헌에서 수없이 가마를 지피며 검은옹기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연구를 거듭했다.
그 결과 노랑굴처럼 1천200도 이상의 고온으로 구워 그릇을 완전히 자화(瓷化)시키면서도 검은빛을 띠게 하는 고화도 검은옹기 기법인 '21세기 검은굴'을 완성했다.
기법이 완성되기까지 불과의 사투는 이어졌다.
소나무재선충병 유행으로 가마의 주된 땔감이었던 소나무 반출이 금지되자 화력이 오래가는 참나무 장작을 수소문해 썼고, 작업실 주변에 민가가 들어서며 연기로 인한 민원이 잇따르자 과감하게 큰 가마를 허물고, 전통방식에 내화벽돌을 활용해 효율 높은 소형 가마를 새로 지었다.
항상 일기예보를 확인해 2∼3일 이상 비 오는 날만 골라 119에 사전 신고를 한 뒤 이틀 밤낮으로 가마에 불을 지피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가마 굴뚝 위에는 CC(폐쇄회로)TV까지 설치해 스마트폰으로 굴뚝 연기 상태를 실시간 확인하며 참나무 장작을 조금씩 밀어 넣는 방식으로 불을 땐다.
가마 뒤쪽까지 온도를 높이기 위해 마지막 순간 가마 옆구리 구멍(독새기 구멍)으로 잔가지를 밀어 넣는 전통 '창불질'을 더하고, 아유미 씨는 시간대별 온도 변화 데이터를 그래프로 만들어 노트 수십 권에 꼼꼼히 축적해 최적의 번조 조건을 뽑아냈다.
고온에서 단단하게 구워내니 미세한 숨구멍을 살리면서도 물이 새지 않았고, 주방 세제를 사용해도 스며들지 않는 내세제성 시험까지 통과할 수 있었다.
여기에 틀을 쓰지 않고 오직 손기술만으로 두께를 얇게 성형해 '옹기는 무겁다'는 편견마저 깼다.
정미선씨는 섬세한 생활 도자기와 감성적인 소품 등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현대적 생활 공예 작업에 집중하며 강 명장과 시너지를 냈다.
이들의 손을 거친 제주 흙은 물허벅과 항아리를 넘어 세련된 와인칠러, 파스타볼, 찻주전자, 머그컵, 꽃병 등으로 거듭났다.
옹기의 다공성 호흡 구조를 활용한 커피 드리퍼는 커피의 깊은 향을 살려낸다는 입소문을 타며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제주와 경주의 유명 커피 전문점인 '커피템플'이 제공하는 모든 잔과 저그가 강 명장 부부가 만든 옹기다.
◇ 제주 옹기 문화의 거점이자 세대 전승의 출발점…'담화헌'과 '제주옹기숨미술관'
강 명장 부부가 2013년 문을 연 담화헌과 2018년 제주도 등록 제1종 사립미술관으로 인가받은 제주옹기숨미술관은 제주 옹기의 현대적 가치를 오감으로 경험하는 거점이 됐다.
방문객들은 잘 정돈된 공간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옹기 드리퍼로 내린 커피와 차를 마시며 직접 제주 흙을 만져 그릇을 빚어볼 수 있다. 3년 전부터는 장애 자녀를 둔 어머니들을 매달 초청해 가볍고 실용적인 옹기 잔을 함께 만드는 힐링 수업도 이어가고 있다. 투박한 민속품으로만 여겨지던 옹기가 가장 트렌디하고 따뜻한 'K-리빙 오브제'로 재발견되는 현장이다.
이러한 우직한 노력은 2023년 제10회 대한민국 옹기공모전 대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과 제주도 도자공예 명장(제4호) 선정, 2025년 대한민국 우수숙련기술자 선정으로 열매를 맺었다.
최근에는 호주 등 해외에서까지 제주 옹기 기술을 전수받고 싶다며 제자로 받아달라는 요청이 잇따르고, 젊은 현대미술 작가들과의 협업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 "제주 옹기 명맥 잇는 것만으론 부족…후세에 발전적 전승해야"
강 명장은 최근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현 제주시청 일대와 도남·노형·광령리 등 제주시 권역의 옛 옹기 역사를 재조명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최근에는 1960년대까지 가마가 성행했던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의 노랑굴·검은굴에 대한 복원 작업을 이끌었으며, 조만간 그 결과물을 선보이는 검은옹기 전시회도 열 예정이다
강 명장에게는 요즘 새로운 고민과 기대가 교차한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는 아들이 옹기 장인의 고단한 삶 때문에 가업 승계를 주저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영국 유학을 마친 딸이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해외 시장에 부모의 제주 옹기를 알리는 든든한 지원군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강 명장은 "일 년에 한두 번의 장작가마 불 때기 행사만으로는 결코 옛 장인들의 기술을 따라잡을 수 없고, 문화란 누군가에 의해 한 단계 더 발전해 다음 세대로 전해져야 살아남는다"며 "단절 위기에 놓인 전통 옹기의 맥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형식적인 계보나 옛 작업 방식을 고수하는지 여부보다 현장에서 실제로 흙과 불을 다루는 실력과 성과물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제도적 지원이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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